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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의해 사할린 강제동원…한인 희생자 유해 14위 봉환
 
7일 천안 국립망향의동산에서 추도 및 안치 행사 거행
장승유 기자 | 2019.10.08 11:17 입력 | 2019.10.08 11:2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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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장관 진영)가 대일항쟁기(1938~1945년) 일제에 의해 사할린으로 강제동원됐다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한인 유해 14위를 봉환, 10월 7일 천안에 있는 ‘국립망향의동산’에 안치했다.
 
정부는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모두 6차례에 걸쳐 한인 유해 71위를 봉환한 바 있으며, 이번이 7차 봉환으로 전체 봉환 유해는 85위로 늘었다.
 
사할린 현지 10곳의 공동묘지에서 수습된 유해는 6일 인천공항을 통해 ‘국립망향의동산’으로 봉환됐다. 정부는 7일 오후 2시 추도식 후 유해를 봉안당에 안치할 계획이다.
 
봉환에 앞서 지난 5일 유즈노사할린스크 한인문화센터에서는 러시아 정부 관계자와 한국 영사관, 사할린한인협회 등 동포들이 참여한 가운데 추도 및 환송식이 열렸다.
 
사할린의 한인 피해자는 대일항쟁기에 강제로 끌려가 탄광, 토목공사, 공장 등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렸으며 고국 땅을 그리다 한 많은 생을 마감해야 했다.
 
징용으로 끌려갔던 이들은 광복 후에도 일본 정부의 방치와 구(舊) 소련의 무관심으로 귀환길이 막혔다가, 1990년 한·러 수교가 이뤄지면서 귀환 길이 열렸다.
 
아버지 고(故) 이석동(1915~1987년)씨의 유해를 봉환한 아들 이희권(42년생)씨는 “1980년대 초 우연히 아버지에 대한 소식을 알게 됐는데 살아생전 고국에 돌아오는 것이 꿈이셨다고 했다”며,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따뜻한 고국 땅에 모셔 평생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드린 것 같아 더없이 기쁘다”고 말했다.
 
할아버지 고(故) 정용만(1911~1986년)씨의 유해를 봉환한 손자 정용달(68년생)씨는 “1943년 초여름, 논에 물 대러 나갔다가 징용에 끌려간 남편과 생이별을 한 94세의 할머니는 6살 사내아이와 뱃속의 딸을 홀로 키우며 한 많은 삶을 사셨다. 남편이 한 줌의 유골로 돌아왔지만, 할머니도 기뻐하실 것”이라며, “이미 선산에 할아버지께서 영면하실 산소까지 조성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사할린 지역의 한인 희생자 유해봉환 사업과 강제징용 한인들의 기록물 수집이 안정적이고 원활히 추진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보완하기 위해 러시아 정부와 ‘정부협정’을 추진 중이다.
 
진영 행정안전부 장관은 이날 윤정인 차관이 대독한 추도사를 통해 “70여 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오신 열네 분의 영령들께서 편히 영면하시기를 기원한다”며, “태평양 지역과 중국의 해남도 등 국외로 강제동원 됐다가 아직 돌아오지 못한 희생자들을 고국으로 모셔올 수 있도록 유해봉환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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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초여름.
경북 영천의 어느 농촌 마을.
조반을 먹고 논물 대러 나간 남편은 당거미가 밀려 어둑어둑해져도 돌아오지 않았다.
오후께 트럭에 실려 어디로 가는 것을 보았다는 이야기만 들려올 뿐...
그때 강제로 끌려 간 남편은 32살(1911년생).
한 살 아래인 아내는 6살 사내아이와 뱃속에 있던 딸을 홀로 키우다 94세에 한 만은 세상을 떠났고, 남편은 76년이라는 세월의 옹이 끝에 한 줌 흙이 되어 고국 땅을 밟는다.
'힘 없이 죽은 사람 어데 있으며,
핑게 없는 누덤이 어데 있으랴!'
'남의 눈에는 평범한 사람처럼 보여도 늙은 가슴에 서러 오는 옷쓸한 고민 연기도 없이 탄단다.
고생도 한 가지 시불쌍하신 너의 모친 건강은 엇더하냐 묻고자 한다.
련이니 하고 또 삶의 길에 응당 차저 드는 시련이 거니 하고 쓴웃음으로 달래도 본단다.'
쏘련 땅 사할린에서

아부지 서 1985. 1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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